첫 번째 영화,

 <한여름의 한타지아>



'폭죽이 터지는 순간'




<로맨스 조(ROMANCE JOE)>, 이광국(2011)



“시간은 다 되었지만”


  ‘로맨스 조’는 할 말이 없다. 아니, 할 말은 많지만 할 이야기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영화감독인 그는 이야기를 잃은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깔끔한 죽음 뿐이라고 믿는다. 어느 여관방에서 자살을 시도하던 그는 모종의 이유로 마음을 달리하고 새로이 살아보고자 한다. 그 모종의 이유란, 방을 잘못 찾은 어느 다방 레지와 우연히 눈빛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혹은, 풀숲 한가운데서 울고 있던 첫사랑 초희가 떠올라서다. 그는 말한다. 절정의 시간은 지나갔고,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해. 

  하지만 <로맨스 조>의 인물들은 여전히 그의 흘러간 ‘절정’을 좇고 있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 상경한 노부부와 그 아들의 친구가 한 쌍을, 마감할 시나리오를 미뤄둔 자칭 ‘300만 관객’의 감독과 다방의 레지가 다른 한 쌍을 이루며 나누는 일련의 대화들이 <로맨스 조>의 유일한 현재 진행형 서사이다. 낯선 여관방은 이들의 하나뿐인 무대이며, ‘이야기’란 풍족하게 남겨진 시간을 흘려 보낼 수 있는 필요 불가결의 유희이다. 이들은 서로의 입과 눈을 빌려 ‘로맨스 조’를 중심에 둔 이야기의 틀을 한 코씩 떠간다. 그러나 이들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데다, 이야기의 어떤 조각은 특정한 인물이 창작한 영화 시나리오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현재 발화하는 자는 누구인지, 장면들이 인과의 순서에 맞게 재현되고 있는지 파악하려는 시도들은 종종 무산된다. 진실과 진실 아닌 것을 구분 짓지 않으려는 영화의 태도에 따라, 상상과 우연을 덧입힐수록 이야기는 도리어 완전해진다.


  그러나 말의 오고 감을 모두 대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들이 곧 ‘진짜’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이들의 대화는 영화 전체의 서사를 이끌어갈 만큼 흥미롭지만, 그 내막은 대부분 부연에 불과하다. 서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에둘러진 겹겹의 설명들을 지우고 나면, 거기에는 오직 단 하나의 이야기만이 닫힌 시간 속을 영원토록 공전하고 있다. 그것은 영화에서 현재 유일하게 발화하지 않는 존재인 초희의 시선으로 빚어져 있다. (소문의 공포를 아는 사람만이 쉽게 입을 열지 않는 법이다.)

 

  <로맨스 조>에서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곧 세계의 바깥으로 사라진다는 불문율을 안고 있다. 오리무중 죽음 속으로 사라진 여배우 우주현처럼, 초희는 등 뒤로 숱한 말들이 뒤따르는 소녀이다. 주인공 소년에게 소위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자 절정인 초희는, 나무 밑에 주저앉아 울고 있거나 나룻배에 마주앉아 손을 맞잡던 기억이며, 갑자기 나타나고 갑자기 사라지던 한 장의 아른거리는 이미지다. 그러나 기사를 자청하던 소년은 소녀의 불행을 함께 이고 갈 용기가 없기에, 타지의 여관에 혼자 남겨지게 된 소녀는 다시 소문이 된다. 

  여기에는 다소 감상적인 아름다움을 품은 후일담이 덧붙여진다. 성인이 된 초희와 영화감독이 된 소년 로맨스 조의 우연한 재회다. 이야기의 중심이었던 초희는 이제 ‘화면을 바라보면 안 되는’ 엑스트라로 자리해, 자신이 아니게 된 자신의 이야기를 바라본다. 실제의 기억보다 선명해지고 아름다워진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위해, 원본의 그녀는 기꺼이 자리를 뜬다. 

  이 시퀀스는 끝내 (로맨스조에게 발견되지 못한 채) 초희의 시선으로 걷어진다. 그러나 재회의 기록을 증명할 유일한 인물인 그녀가 영화의 시제 바깥에 놓여있는 까닭에, 위의 시퀀스는 모종의 의심스러움을 풍긴다. 발화하지 않는 인물의 시선만으로 채워진 이 재회는 작품 속 또 하나의 가상일까. 그러나 인물들의 바람이 공기처럼 감싸여져 있는 이 ‘만약의’ 허구에 놓인 아름다움을 부연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영화의 시제 밖으로 사라진 초희를 대신하는 것은 로맨스조와 하루를 보내는 다방의 레지다. 그녀는 여러모로 초희의 현현처럼 읽혀진다. 그들은 모두 아리랑 다방의 레지이며, 손목에 자해의 흉터가 남아있고,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어린 아들을 두고 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간을 두고서 책 <마담 보바리>를 손에 쥔다. 자살을 시도하던 때 로맨스조는 초희와 레지의 이미지를 번갈아 마주한다. ‘절정의 시간은 지나갔’다지만, 시간의 흔적은 다시 주인공의 곁을 맴돌며 재현된다. 지나가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채로, 간절함으로 죄책감으로, 기이한 소망으로 내내 그의 곁을 떠돈다. 다방의 레지가 초희와의 이야기가 시나리오로 쓰이기에 충분히 ‘좋은’ 이야기라고 말할 때에 기묘한 위화감과 위로의 감각이 동시에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세헤라자드와도 같은 말의 권력을 가진 레지는, 배우 우주현이나 초희를 비롯한 여성인물들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 이야기란 남성과 하루를 보낼 생존의 수단이며, 말의 매혹은 거기에 멈추어져 있을 뿐이다. 레지가 현실의 어린 아들과 통화하는 동안 그녀와 시간을 보낸 ‘300만 관객’의 남자는 이야기의 망상 속에 빠져 자신의 시나리오를 마감하지 못한다. 한편 영화 전체를 두고 하릴없이 이야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주인공 로맨스 조는 이제 그 자신이 말의 함정 속에 길을 잃는다. ‘존재하지 않는 번호’인 그는 사라지기를 강요당한다. 아직 해야 할 말들이 남아 있으나 시간이 다 된 기억 앞에서, 누군가는 그렇게 사라져가곤 했다. 오직 남아있는 자들만이 이야기의 미로를 헤맨다. 

2017.09.24.

<안녕>

  


  자주 이별하며 산다. 돌아오는 길에는 마지막을 생각한다. 그렇게 먼저 헤어지고 나면 다가올 끝이 조금 덜 두렵다. 오늘 마지막 일기를 쓴다.


  일기는 오래된 습관이다. 중학교 삼학년 때 꾀병으로 조퇴를 했다. 교문 밖은 교실에서 봤던 것처럼 흥미롭지 않았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한참을 걸어서 영화를 보러 갔다. 가장 빠른 표를 샀다. 2006년에는 <괴물>, <가족의 탄생>, <후회하지 않아> 등이 개봉했다. 그 날 나는 <각설탕>을 봤다. 보고 울었다. 이유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고 노트와 펜을 사서 일기를 썼다. 홀로 나와 영화 보는 기분이 좋았다. 어설픈 감상평을 쓰는 건 더 좋았다. 나는 점점 병약한 학생이 되었다. 그 후 일기를 쓰지 않아도 매년 일기장을 샀다. 


  Cinegraphy를 시작하기 전, 일기는 일기장에 써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어설픈 취향 고백은 혼자 간직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낯부끄러운 줄 모르고 매달 일기를 썼다. 내가 했던 말이 덜그럭거렸다. 그럼에도 일기를 좋아해 줘서 좋았다. 잘 읽고 있다는 말을 고백처럼 한참 안고 다녔다. 덕분에 오래 쓸 수 있었다. ‘너와 함께할 수도 없지만, 너 없이도 안 된다.’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을 일기장에 적었다. 오늘까지 스물두 번 일기를 썼다. 일기장에서 나는 어쩌다 책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대체로 반성하고, 사과했다. 


  요즘 아침마다 한 톨의 흔적도 흘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지하철 끄트머리 칸에서 조심히 구겨져서 출근한다. 세상에는 미안하고, 죄송한 일이 너무 많아서 입술이 마르지 않는다. 반갑다는 말과 다시 보자는 말을 조심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약속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길로 집에 돌아온다. 그럼에도 저녁마다 한 움큼씩 반성해야 한다. 어제의 일기다. 


  앞으로도 매일 반성문과 보내지 못할 편지들을 쓸 것이다. 아는 척하며 문학과 영화에 대해 주절거리고, 마주했던 순간에 대해 기록해둘 예정이다. 영화로운 순간을 발견하고, 쓰겠다는 말은 아무래도 실패한 거 같다. 쑥스러운 일기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영화로운 순간들을 적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참 고마웠습니다.’라고 쓰고 일기장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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